2016년 9월 17일 경복궁 나들이...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너무 고와서 경복궁을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선남 선녀들이 보여서 셔터를 마구 눌렀지만 초상권이 걱정되어 꼬마 사진사님 사진을 제외하고는 포스팅에서 제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너무 고와서 경복궁을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선남 선녀들이 보여서 셔터를 마구 눌렀지만 초상권이 걱정되어 꼬마 사진사님 사진을 제외하고는 포스팅에서 제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건 반대쪽 달맞이 고개쪽 사진입니다.
동백섬 일주를 다녀오다가 영도대교를 보고 셔터를 놀렀습니다. 삼각대 놓을 곳이 없고 바닥이
숙소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일찌감치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제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사진입니다.(하이코리아 유스호스텔)
깨끗하고 친절하고 썩 괜찮은 곳이어서 다시 부산에가면 들러볼 예정입니다.
"까짓거 글러브도 있는데 직접 한번 해보지 뭐..."
어느날 아버지가 뜬금없이 사다주신 글러브가 인연을 만들어 주었을까요?
국민학교 4학년시절 학교에 나붙은 야구부 창단 공지는
선린상고를 비롯한 고교야구 주요팀 라인업을 줄줄 외우던 꼬마아이를 직접 그라운드로 내몰았습니다.
처음 유니폼을 받는 날은 어찌나 덜리고 기분이 좋던지 그날의 그 순간이 사진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모자와 유니폼에 새겨진 학교이름, 등뒤엔 선명하게 수놓아진 제 이름 그리고 백넘버 4번.
친구들은 백넘버만 보고 제가 4번타자인줄 알아서 곤란했지만 말입니다... ^^;;
비록 백업 중견수의 험난한 생활이었지만
호시탐탐 투수로의 전업을 꿈꾸며 즐겁게 2년반이라는 기간동안 뛰고 달렸던 기억이 나네요.
겨울이면 눈을 치워가며 동계훈련도 하고 찌는듯한 여름에 지옥훈련도 하면서 열심히 했지만
신생팀이고 경력도 일천한 선수들이라 많지않은 지역학교들과 교류전에서도 이긴 기억이 별로 없군요
(아마 안모선수와도 경기장에서 만났을 수도...)
무성의한 주루플레이를 했다고 저녁 늦게까지 베이스러닝 훈련을 하던 기억...
공을 무서워 하면 안된다고 포수장비를 입히고 눈을 안감을때까지 마스크에 공을 던지던 코치님에 대한 기억...
모처럼 이긴 경기 후에 특별하사품으로 나눠주던 아이스크림의 맛이라든가..
뭐 이런 기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기합받고 채벌당하던 기억은 기억 깊숙히...
(어린애들 뭐 때릴데가 있다고 팬티가 안벗겨지게 부을정도로 엉덩이를 때리는지 T_T)
어쨋거나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부도 퇴단하고 직접 하는 야구에선 멀어졌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아.. 할일도 없는데... 한번 가볼까?"
그렇게 까맣게 직접하는 야구와 멀어져 지내던 어느날... 12월 31일 밤.
여느때처럼 하이텔을 방황하던 중 베어스 동호회에서 모 회원이 야구하고 싶으면 경희대 운동장으로 나오라는 제안을 하더군요.
더구나 다음날 아침 티비속 드라마에선 새해부터 집구석에서 빈둥대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오고...
그래서... 갔습니다. 버스타고 얼굴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야구단 모임에....
그리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두번째 베이스볼 플레이어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엔 2루수... 겸 배팅볼투수..
투수가 하고 싶었지만 어린시절 나를 좌절케했던 소녀어께는 늘그막한 나이가 되어서도 나아진게 없더군요.
하지만 나름 갈고 닦았던 컨트롤이 빛을 발하는 바람에 타자들에겐 딱 구미에 맞는 배팅볼을 던져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OTL
여성선수마저 외야플라이를 날릴 수 있을정도로 적절하게 최적화된 스피드와 컨트롤은
저를 배팅볼 전문 투수로 밖에 활용할 수 없게 만들었고
주 포지션이었던 외야에서도 퇴출되어 2루수로 정착을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뭐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서 좆겨나지 않으려고 나름 투수를 하려던 경험을 되살려
피칭연습을 하고 싶어하는 여성회원들에게 투수코치역할도 맡는 멀티 플레이어로 거듭났습니다.
1주일에 한번정도 경희대에서 피칭연습을 봐주곤 했는데..
적절한 폼에서 직구와 커브를 던지던 그 아가씨(^^;)가 꽤나 인상깊었는지
연습하던 경희대 야구부원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곤 했었죠
(아마 그때가 홍성X선수가 학교다닐때가 아닐라나??)
그뒤로 집이 이사를 가고 팀이 사회인야구쪽으로 특화되어가면서 주전경쟁에서 밀리고 T_T
자연스레 다시 글러브를 놓았습니다만
요즘 여자야구팀에 들어가서 열심히 하는 회사 여직원을 보면 문득 문득 그라운드로 돌아가
제3의 베이스볼 플레이어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
E-MAIL에 스팸이 거의 없던 시절...
메일 동호회라는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 한통의 편지를 동호회 전체에게 보내는 모임이었다고 하는데
1:1로 보내는 개인적인 메일이 아니아 1인이 다수의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점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적극적인 블로깅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은 한통의 편지를 보내지만 회원의 숫자만큼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모임을 만들어보는게 통신하던시절 내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고 결국 그 소망은 소망으로 끝났다.
(후일 아주 작은 소집단에게 정기적으로 메일을 보낸적은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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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펜팔을 하게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건지는 기억이 선명치 않지만 우연히 들어갔던 대화방에서 만났던 분에게
메일로 무언가를 알려줄 일이 있었고 그 메일에 고맙다는 답장이 오고 그 답장에 답장을 보내고..
그러다보니 그분과 어느새 펜팔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당시 밤늦도록 채팅을 하던 학생이었던 나는 직장에 다니는 그분과 펜팔을 하기위해
채팅 중간중간 메모장을 통해 편지를 틈틈히 써서 로그아웃 하기 전에 발송을 했고
그 메일을 출근해서 읽은 그 분은 근무 틈틈히 작성을 해서 퇴근하기전에 보내곤 했다.
매일 한통의 편지를 받고, 매일 한통의 편지를 쓰는것.
그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걸 깨달은건 그리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였다.
나름대로 인생에서 가장 활발하고 자유스러운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었음에도
막상 하얀 편집기를 앞에 두면 편지에 담을 소재가 늘 부족했다
눈은 채팅화면에 올라가는 친구들의 글을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그날 있었던 일이나 편지에 쓸만한 내용을 생각해야 했고
그 멀티테스킹은 당시 만만찮은 스트레스 였다.
아마 그때부터라고 생각한다.
밤에 그날 낮에 있었던 일을 되집기 보다는 편지에 쓸 소재를 낮시간 동안 찾게 되었고
무심히 지나가던 일상에 슬슬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버스안에서 스쳐가는 간판을 읽는다거나(아직도 기억나는 가게 이름대신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라고 큼직하게 써있던 어느 슈퍼)
지하철 앞자리에 앉아있던 꼬마 아가씨와 눈인사를 건네고 환한 미소를 건네받는다든지...
귀가길 문득 동작역에 내려 여의도 뒤편으로 지는 노을을 지켜본다든지...
평소 걷던 루트가 아닌 길로 걸어본다든지...
라디오나 길거리에서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노래 제목이나 가사를 일부러 찾아본다든지..
그분이 토요일 퇴근하기 전 보낸 메일에 대한 답장을 월요일 아침에 받게 되므로
공휴일이나 휴가가 아닌 한 1주일에 6통씩 거의 꼬박고박 진행되었던 그분과의 팬팔은
근 1년이 넘게 계속되어 300여통의 편지를 보냈고 그만큼의 편지를 받았다.
소중한 편지들은 하드디스크가 망가지면서 몇년전 소실되었지만
다행히 그전에 프린트해서 보관해둔 일부분이 남아 그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회사 E-MAIL에 쌓여있는 2만통의 스팸메일을 보면서...문득, 그때 그분과 나누었던 팬팔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예전에 그리 눈여겨 보곤 했던 일상에 무관심해져 있는 내 자신도...
오늘은 퇴근길에 차창밖에 지나가는 겨울을 한번 느껴봐야겠다...
그리고 연락이 소원했던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라도 몇통 보내야겠다...
일본드라마 '유리의 섬'의 무대가 되었던 섬의 사진입니다.